버려진 고무장화

from Off Topics 2009/01/28 19:32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는 것을 즐길지도 모른다고. 가끔은 이런 생각이 마음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다가 문득 떠오른다. 이성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떠오르는 것이다. 낚시터에 버려진 고무장화가 바늘에 걸려 수면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가끔 어떤 생각들은 그런 식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런 생각은 굳어져 간다.

60년 전 쯤 사람들은 서로를 굉장히 많이 죽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은 옛날의 일들은 다 잊어버린채 오늘도 그 짓을 반복하고 있다. 지금도 신문을 펼치면 중동에서 전쟁으로 몇 명이 죽었다느니, 아프리카에서는 어느 부족이 다른 부족을 인종청소했다느니 따위의 기사가 가득하다. 이것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거의 일상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거의 매일 보아 왔던 사실이다. 이런 살인행위는 마치 우리 인생의 배경음악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소리를 내고 있다. 배터리도 떨어지지 않고 무한반복으로 말이다.

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이런 끔찍한 일들은 인류애적인 평화사상(얼마나 듣기만 해도 거창한 단어인가)이 점점 전파되어 가면 언젠가는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내 생각의 밑바닥에서 떠오른 이 버려진 더러운 고무장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인간은 원래 서로를 죽이는 걸 즐기지. 예전부터 그랬어."

"그래도 먼 옛날에 비해 세상은 점점 나아지고 있잖아. 그렇지 않아?" 내 안의 다른 목소리는 말한다.

"그건 웃기는 소리야. 죽이는 방법이 좀 더 세련되게 다듬어진거지. 달라진 건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인간이라는 동물이 태어난지 얼마 안됐을 때는 돌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그 피를 즐겼어. 그리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칼을 만들고, 그 다음에는 총을 만들고, 나중에는 원자폭탄을 만들어 지구를 없애버릴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그래, 지금 우리 시대의 인간은 모니터 위에서 사람이라고 불리는 점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큰 희열을 느끼더군."

"그래도 희열을 느끼는 것까지는 아니잖아. 누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희열을 느끼겠어?"

"넌 너무 순진하구나. 무기만 세련되게 다듬어진게 아니야. 희열을 느끼는 방법도 더욱 세련되게 변했어. 이제 사람들은 전쟁으로 경제지표가 상승하는 것을 보며 즐거워한다구. 악당이거나 악당이 될 것 같은 나라를 정해서 공격만 하면 돼. 돈도 벌고, 가족도 더 안전해지고, 좋은 일 한 것 같아서 좋고. 얼마나 좋니? 전쟁을 예방하기 위한 전쟁이라. 아마 인간만이 해낼 수 있는 위대한 생각일거야."

"..."

"짐승은 배가 고파서 다른 짐승을 잡아 먹을 뿐이야. 하지만 인간은 그저 즐거워서 서로를 잡아먹는 거야."

"어떻게 인간을 짐승에 비교할 수가 있니? 인간은 짐승과는 다르게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다구.."

"그 합리적인 이성으로 인간은 무엇을 해왔니? 고작해야 제 배를 불리려는 일 뿐이지. 짐승도 하지 않는 짓들을 엄청나게 저질러 왔다는 걸 너도 알거야. 아우슈비츠나 난징에서의 일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겠어. 어쩌면 인간의 이성이란 식욕 같은 원초적 본능보다 더 잔혹하고 비합리적일지도 몰라."

"..."

가끔 나는 이런 생각도 한다. 인간은 결코 서로 소통할 수 없다는 생각 말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서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도 하고, 식당에 가서 '불고기 4인분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느냐고? 그러면 어김없이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라거나 '네, 주문 받았습니다.'라는 답변이 나오겠지. 하지만, 어쩌면 당신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종류의 소통이 아니라는 것을. 이 세상은 결코 서로를 이해해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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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윤석영 2012/01/11 12:0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한다

  2. BlogIcon 김용대 2012/01/13 07:3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짚신도 짝이 있다